플라톤의 '개념', 이것의 이전에는 소크라테스의 공이 먼저 있었습니다. 바로 이 '개념'에 해당하는 것을 도출하는 과정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솔직히 이렇게 딱딱하게 공을 각각 나누어 누군 뭐했고 누군 뭐했다 식의 역할 놀이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어쨌든 누군가가 그것을 했다는 것이니까요. 뭐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그 '개념'을 도출하는 과정인 산파술은 대체 무어냐? 산파술의 구조는 딱보면 변론술과 차이가 없어보인다만, 그 결정적 차이점은 이곳 저곳에 흩뿌려져있지요. 그것에 대해 살펴봅시다.

 

산파술의 경우, 그 목적이 화자가 청자와의 말싸움에서 이기고 그로써 절대진리에 대한 부정을 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상대자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좀 더 명확히 정리시켜주는데 그 목적을 둡니다. 소피스트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다에 근거해 변론술을 펼친 반면, 소크라테스는 "개인별로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르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는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사람들마다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은 산파술을 통해 끌어낼 수 있다."고 보았죠. 즉, 소피스트보다 한 단계 진보된 형태가 소크라테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서 소크라테스의 직제자 플라톤의 향연에 보면,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를 포하만 수십명의 제자가 진리에 대해 말싸움이 붙어, 소피스트 모두가  소크라테스에게 박살났다는 기록이 대화편에 남아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이어지는 동안, 그 질문에 답변하는 자는, 정리되지 않은 채, 막연히 머리속에만 떠돌던 내용들이 차분히 정리되게 되고, 그로 인해, 진리의 지식에 좀 더 명확히 다가갈 수 있으며, 그래서 산파술은 화자에 의해 일방적인 결론을 도출한채 끝나는 소피스트식의 변론술과는 달리, 어느정도 명확하게 이끌어내진 상대자의 답변으로서 끝을 맺게 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의 차이점입니다. 즉 변론술의 주체는 화자이지만, 산파술의 주체는 청자입니다. 이성을 통해, 청자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 그러는 과정에 도와주는 입장인 산파술(산파는 아기를 대신 낳아줄 순 없지요. 다만 도와 줄 뿐이죠. 이렇듯 산파술이란, 진리에 대한 지식의 깨우침은 스스로에 의한 것이며, 소크라테스와 같은 질문자는, 다만 그 스스로의 깨우침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인 대화법입니다.)을 그의 주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이 산파술에 의해 도출된, 대상에 대한 명확하고 공통적인 본질이 바로 '개념'이며, 이런 개념의 철학은 2500년 서양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중요한 창이 되어버립니다.

 

서양철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말장난 같으면서도 유추와 비유 등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설득해 나가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 시대에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절실한 덕목일 것입니다. 책은 메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세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며 열린 재판에서 소크라테스가 변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차, 2차, 3차에 걸쳐 소크라테스는 청년들과의 문답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음을 변론하지만 결국 그에게는 사형이 선언되어 감옥이 갇히게 됩니다.

내게 사형을 선고한 아테네 사람들이여, 제우스를 걸고 맹세하건대, 내가 죽자마자, 여러분이 내게 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형벌이 여러분을 덮칠 것임을 나는 분명히 말해두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게 이렇게 한 것은, 나를 죽이면 여러분의 삶이 비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그런 것과는 정반대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그런 사람들을 억제해 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나이가 젊기 때문에 더 가혹하게 비판할 것이고, 여러분은 더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2500년 전의 인간사와 현대의 인간사는 어쩜 이렇게도 닮아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예언한 이 저주는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외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을 빼내기 위해 친구 크리톤이 찾아오고 이 둘의 대화가 바로 크리톤편입니다. 크리톤이 자신의 권력을 모두 사용하여 소크라테스를 구출하고자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원칙을 비유법으로 설명하며 친구를 설득하고 크리톤은 슬프지만 받아들입니다. ​파이톤편에서는 아테네 감옥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날 새벽부터 소크라테스의 최후까지 지켜 본 파이톤이 에케크라테스에게 그 날의 대화를 전해줍니다. 삶과 죽음, 몸과 영혼.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소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로서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닌 다른 시작이었고 오히려 신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의 추종자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논리와 인격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한발한발 논리를 전개 할 때마다 그는 다른 이의 확인과 이의를 묻고, 들으며 자신의 견해를 확장하고 다시 고민합니다. 참된 진리의 여부를 떠나 소크라테스의 문답은 점차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만 찾으려는 현대사람들에게 한번쯤은 멈추고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짧게 줄인 말들과 순간적인 자극을 쫒아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밀쳐내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소크라테스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생각해봅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낀바가 많았습니다. 산파술이라는 교육방법이 수안머에서 말하고 있는 가장 완벽한 코칭이 아닐까 합니다. 제자 스스로 진리를 찾아 가게 하기 위해 끝임없이 의문을 제시하여 사고의 경지를 최상의 상태를 유지시키려면 스승은 제자의 사고의 흐름을 함께 해가거나 이미 그 과정을 선험했을때 가능하기에 올바른 산파술(코칭)을 실현하기 위한 스승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보여집니다.

 

읽고나서  불교 선종에서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 중의 하나인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산파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승이 제시한 답도 없는 화두에 빠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몰입의 경지(깊은 명상)에 들어가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답을 찾아서(돈오를 경험) 다시 스승에게서 깨달음에 대한 검증을 받는 중에 끝임 없는 선문답이 오가고  깨달음에 도달하였다는 인정을 받은 후에는 (사실 깨달음은 누가 검증해 줄 수는 없는 것이기에 깨달았다는 검증이라기 보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즉 돈오의 경험과 깊은 명상에 도달 할 수 있는 경지를 인정 받는 것입니다.) 다시 스스로의 화두를 정해 끝임 없이 정진해 가면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코칭을 통해  학생이 몰입  속에서 문득 스치듯 떠오른 실마리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돈오와 같고, 그러한 경험을 한 학생은 스스로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어  코칭의 마지막 목표인 학생 스스로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갈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주는 것이겠죠. 수학에서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인 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에 도달 할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란 화두를 던져 봅니다.

 

돈오점수 [頓悟漸修]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말. 이에는 그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하여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돈오돈수 [頓悟頓修] 불교에서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라는 뜻으로, 단박에 깨쳐서 구경각(究竟覺;궁극적이고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경지)에 이름으로써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가르침 속에 언급되었으며, 한국 현대불교에 큰 자취를 남긴 성철(性徹)이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반박하며 제기함으로써 큰 논쟁을 일으켰다. 고려시대 지눌(知訥) 이래 한국불교 수행법의 주류로 이어져 온 돈오점수는 단박에 깨친다는 점에서는 돈오돈수와 같지만, 깨치고 나서도 점진적으로 수행하여야 깨침의 경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돈오돈수는 깨치고 난 뒤에도 더 수행할 것이 남아 있다면 진정으로 깨치지 못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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