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 집합을 구성하는 객체. 집합과 마찬가지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개념 중 하나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의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개념. 무정의 용어라고도 합니다. 집합은 주로 대문자, 원소는 주로 소문자로 표기하나, 현대수학은 모든 대상은 집합의 일종이라 보는 경우가 많기에 맥락에 맞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aa는 집합 AA의 원소이다.'는 a∈A로 표시합니다. 원소 나열법: 집합을 중괄호와 원소를 이용하여 서술하는 방법입니다. '집합 AA는 2, 3, 4를 원소로 가지고 있습니다.'를 A={2, 3, 4}로 표시한다. 집합에 어떤 원소가 있나 금방 볼 수 있지만 집합의 특성을 설명하거나 무한집합을 다룰 때 취약합니다. 조건 제시법: 집합을 집합에 포함되는 원소의 조건을 이용하여 서술하는 방법입니다. {원소|원소의 특성}으로 사용한다. {2, 3, 4}{2,3,4}를 조건 제시법으로 표시하면.{n∣n은 1보다 크고 4 이하인 자연수.}}, {n∈N∣N은 자연수의 집합.} {2, 4}2≤n≤4} 등이 된다. 무한집합을 다룰 수 있으나 특정 객체가 집합의 원소인지 확인하는 건 어렵습니다. 가령 '무리수의 집합'이란 개념은 쉽지만, e^π 가 무리수인지(=무리수의 집합의 원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원소나열법과는 달리 어렵습니다.


공집합: 원소가 없는 집합. 공집합 역시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개념 중 하나. 공리적 집합론에선 공리를 통해 공집합의 존재성을 보일 수 있습니다. 또는 아예 처음부터 공집합이 존재한다는 공리(존재 공리, axiom of existence)를 깔기도 합니다. 집합론의 추상성을 처음 느낄 수 있는 개념입니다. 공집합을 나타내는 고유의 기호 ∅는 ϕ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기호인데, 엄격하지 않은 책에서는 편의상 그리스 문자 ϕ(phi)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한때 중고등학교 교과서 등에서도 그리스 문자로 나타내었기에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벤 다이어그램: 집합은 원이나 타원 등의 단일폐곡선으로, 원소는 점으로 나타내 집합간의 간단한 관계를 표현하는 다이어그램. 2차원 공간에 단순도식화하여 표시하는 것이므로 아무래도 복잡한 집합 관계는 표현하기 힘듭니다. 또한, 벤 다이어그램은 증명에 사용될 수 없습니다! 증명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학생들에게 집합 증명문제를 주면 벤 다이어그램을 그려오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 증명을 보는 사람에게 직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할 수는 있어도, 증명으로서의 가치는 없습니다. 명심하자. 부분집합: 한 집합의 원소들로만 구성한 집합. 공집합은 모든 집합의 부분집합이며, 모든 집합은 자기 자신의 부분집합입니다. 'AA는 BB의 부분집합입니다.'는 A⊂B 또는 A⊆B 로 표현합니다. 부분집합이되 원래 집합과 같지 않음을 강조하게 위해서는 진부분집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A ⊊ B 로 나타냅니다.  

상등: 서로 같은 집합을 말한다. 'A가 B의 부분집합이면서 동시에 B가 A의 부분집합인 경우', 즉, A⊂B 이면서 B⊂A 도 성립하는 경우 등호를 써서 A=B로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집합 A를 '2의 배수인 자연수'로 정의하고 집합 B를 '짝수인 자연수'로 정의하면 A와 B는 둘 다 {2, 4, 6, 8, 10,…} 이렇게 똑같이 가므로 이때 A와 B는 상등이 성립합니다. 앞서 말한 '진부분집합'이 '부분집합이지만 상등은 성립하지 않는 집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차집합: 두 집합 사이의 겹치는 원소를 제외하는 연산. 'A 차집합 B'는 A-B 또는 A\B라 쓴다. 조건제시법으론 A−B={a∣a∈A∧a∈/B}. 

여집합: 전체집합 UU가 먼저 결정되어 있을 때, 해당 집합의 원소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은 집합. 일반적으론 A^{c}Ac로 표기하지만 어디에서 여집합을 하는 것인지 명확히 하기 위해 전체집합에서 A를 차집합한다는 의미로 U\A로 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무리수 집합을 나타내는 ℚ^c 의 경우, 전체 집합을 암묵적으로 실수로 보는 경우입니다. 복소수를 전체집합으로 본다면 ℚ^{c}c 는 무리수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차집합을 \로 쓰는 것. 교집합: 여러 집합의 공통 원소를 모은 집합. 'A와 B의 교집합'은  A∩B={a∣a∈A 그리고 a∈B}라 씁니다.   

합집합: 여러 집합의 원소를 모두 모은 집합. 'A와 B의 합집합'은 A∪B={a∣a∈A 또는 a∈B}라 씁니다. 교집합과 합집합을 두 개의 집합이 아닌 여러 개의 집합에 대하여 행할 때는 합 기호(Σ)를 사용할 때처럼 인덱스를 씁니다. 분리합집합: 합집합만으로는 원래 집합의 정보를 잃어버리는 데 반해서, 원래 집합의 정보를 남겨놓은 채로 원소를 모으는 방식. 기호는 분리합기호(⊔)를 씁니다. 역시 여러 집합에 대할 때는 인덱스를 사용합니다. 원래 집합의 정보는 원소 아래에 인덱스를 첨자로 붙이는 것으로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서 A={1,2}, B={2,3}, C={0,1,3}A={1,2},B={2,3},C={0,1,3}이 있다고 하면, A⊔B=1_{a}, 2_{a}, 2_{b}, 3_{b}}, B⊔C={1_{a}, 2_{a}, 2_{b}, 3_{b}, 0_{c}, 1_{c}, 3_{c}}A⊔B={1a,2a,2b,3b},A⊔B⊔C={1a,2a,2b,3b,0c,1c,3c} 같은 형식입니다.   

곱집합: 여러 집합의 각 원소들로 이루어진 순서쌍의 집합. 두 개의 집합 A, BA,B가 있을 때, 'A와 B의 곱집합'은  A×B={(a,b)∣a∈A 그리고 b∈B}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A={1, 3, 5, 7, 9}A={1,3,5,7,9} 이고 B={0, 2, 4, 6, 8}B={0,2,4,6,8}이라면 A×B={(1,0),(1,2),(1,4),⋯,(9,6),(9,8)}이다. 또, A^n로 표시하면 A끼리 n번 곱했다는 의미이며, 이를 이용해 좌표계를 ℝ^n 으로 정의하곤 합니다. 교환법칙과 결합법칙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행렬이나 벡터와 깊은 연관성이 있어 선형대수학 이상의 수학에서 어마어마하게 쓰이는 개념입니다. 곱집합이라고도 하지만, 데카르트 곱(Cartesian Product)이라고도 부릅니다. 단, 곱하는 집합중에 공집합이 존재할 경우, 그 결과물은 공집합이 됩니다.  

멱집합: 어떤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을 모은 집합. 'A의 멱집합'은 멱집합의 영어 표기인 Power set에서 P를 따와P(A)로, 혹은 2^A로 표현합니다 . 예를 들어 P({1,2,3})={∅,{1},{2},{3},{1,2},{1,3},{2,3},{1,2,3}}.추가로 어떤 집합의 멱집합은 그 집합에 대해 위상을 이루는데, 이 위상을 이산위상이라 하고 A에 대한 이산위상을 (A,D)로 나타냅니다. 이산위상의 모든 원소는 개집합이면서 동시에 폐집합입니다. 현대 집합론에서 멱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리로 받아들입니다. 동시에 어떤 집합의 멱집합은 항상 원래 집합보다 큽니다. 유한 집합이든 무한 집합이든 상관없이습니다. 

전체집합: 러셀의 역설을 비롯한 여러 역설을 피하기 위해 집합론을 엄밀하게 전개하게 된 뒤로는 이러한 집합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NBG나 MK에서는 모든 집합의 클래스는 존재합니다. 때로는 다루고자 하는 대상을 충분히 많이 포함하고 있는 집합이 존재한다 등과 같은 가정을 집합론에 추가해서 살펴보기도 합니다. 집합이 얼마나 많은 원소를 가지고 있는가, 어느 집합이 더 많이 원소를 가졌는가의 개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비교는 일반적으로 두 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bijection)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느 집합에서 어느 집합으로 일대일 함수(injection)이 존재하는가 등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두 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 함수(bijection)가 존재하면 두 집합의 크기가 같다고 정의합니다. 만약 비교 대상이 유한집합의 경우 간단히 원소를 하나씩 센 결과를 그 척도로 쓰면 편리할 것입니다. 따라서∣A∣ 혹은∥A∥, cardA로 유한집합 A의 원소의 수를 나타냅니다.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사용하는 n(A)는 학부 이상의 수학에선 사용하지 않는 표기입니다.


무한집합에서도∣A∣의 개념을 만들 수 있는데, 이는 크기보다는 농도 또는 기수(cardinal)라고 불립니다. 표기법도 똑같이∣A∣,∥A∥,cardA인데, 유한집합에서는 하나씩 세는 과정, 즉 자연수 개념을 이용했다면 무한집합에서는 초한기수(cardinal number)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용하여 정의합니다. 농도는 사실상 크기와 유사한 개념이라, 집합론이 아닌 맥락에서 집합의 농도를 이야기하는 다른 분야의 수학책에선 size라 간단히 말하기도 하며, 집합론 내에서도 농도 자체에 크기 개념을 적용한 Large cardinal 같은 용어도 있습니다. 소수의 집합, 자연수의 집합, 정수의 집합, 유리수의 집합은 모두 농도가 같지만, 실수의 집합은 이보다 농도가 큽니다. 그리고 실수의 집합과 복소수의 집합, 사원수의 집합의 농도는 같습니다. 이 신비한 사실이 성립하는 이유는 무한집합은 유한집합과 달리 자신과 자신의 진부분집합간에 1:1 대응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데데킨트는 이부분에 착안하여 이것을 가지고 무한집합을 정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문에 무한집합의 농도 비교는 비수학전공자가 가장 많이 헷갈리는 개념 중 하나입니. (넓은 의미로 보면 집합론도 논리학에 포함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논리적 사유는 엘레아 학파의 제논 및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등 소피스트 사상가들에게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그것이 일정한 학문으로 정립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 입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나, 당장 밑에 참고도서로서 제시되어 있는 닐 부부의 논리학의 역사조차 플라톤에게 한 장 전체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순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어떤 연구자들이 명확히 반대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논리학의 역사에서 말하길 고전 논리 전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완성했다고 종전에는 생각되었으나, 적극적인 논리학사 연구를 통해 열심히 살펴보니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기여도 상당히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런 연구들이 증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헌도가 조금 작았다는 거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 자체를 세우다시피 한 것은 사실이며 《명제론》, 《범주론》 등 함께 뭉쳐져 『오르가논』이라고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서 삼단논법을 비롯한 고전적인 연역논리의 대부분이 마련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이후 스토아 학파 등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명제논리의 많은 부분이 스토아 학파 등 고대 후기의 논리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보에티우스 같은 철학자를 통해 이어진 논리학은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에서 매우 중시되었고, 스코투스 등 유명한 스콜라 철학자 중 많은 이들은 논리학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고전적인 연역논증이 중세에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결(consequence)" 개념이 확립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입니다. 르네상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지성들 사이에서 의심을 받게 됨에 되었고,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적 유산인 논리학 또한 근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침체에 접어들었습니다. 다만 유의할만한 점으로는 그 반작용으로 베이컨 등에 의한 귀납논리의 중요성이 제시된 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귀납논리의 전통은 밀까지 이어집니다. 예외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수학에서 수 대신 대수(代數)를 사용하는 것처럼 논리학 역시 자연언어 대신 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면서, 논리적 보편언어 및 논리적 연산법의 이념, 즉 기호논리학에 해당하는 발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합니다.


이런 침체가 극적으로 해소되기 시작한 것은 드모르간 및 불그리고 퍼스 등이 (기호)논리학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면서부터였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프레게 및 페아노, 데데킨트 등이 산수를 논리학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논리주의(logicism)를 발전시키면서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특히 프레게는 1차 술어 논리 체계를 구체적으로 고안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내려온 논리학을 근본적으로 탈바꿈해놓았습니다. 비록 프레게 자신이 <산술의 기초(Grundgesetze der Arithmetik)>에서 제시했던 기획은 러셀의 역설에 의해 좌초되었지만, 논리주의는 오히려 러셀과 화이트헤드에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브라우어의 직관주의, 힐베르트의 형식주의가 등장하는 등 수학 기초론 논의가 활활 타오름에 따라 논리학 또한 급격한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힐베르트의 23가지 문제 등은 20세기 초 논리학과 수학 기초론이 얼마나 각광받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런 논리학의 발전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은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산술 체계를 포함하는 논리체계가 무모순함과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논리주의와 형식주의를 끝내 좌초시켰으며, 동시에 논리학이 모형 이론, 증명 이론, 집합론 및 철학적 논리학 등 여러 하위 분야로 분화되어 현대적으로 발전하게끔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가운데 혜시, 등석, 공손룡 등 명가(名家) 사상가들 및 묵가(墨家)에서 논리학적 탐구가 발견됐습니다. 명가의 중심적 철학으로는 '명실론'과 '궤변술'을 들 수 있는데, 명실론은 '명'과 '실', 즉 언어가 실재를 가리킬 때의 모호성을 지적하며 이를 명확히 구분하고자 한 이론이었습니다. 궤변술은 역설(궤변)을 탐구한 것으로, 공손룡의 '백마비마'(白馬非馬)와 '견백동이'(堅白同異) 역설이 유명합니다. 이후 묵가의 일부 학파가 이러한 사상을 계승하여 형이상학적 탐구를 지속하였습니다. 

궤변술을 보면, 백마비마설은 백마라는 말은 말이라는 개념에 흰색이라는 개념이 더해진 것이므로 "백마는 말이다"라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인데, 이는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자연언어인 중국어에서 "A는 B이다"라는 말이 "A=B"라는 것과 "A⊂B"라는 개념 모두를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을 때 어떤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돌의 단단하다는 성질과 하얗다는 성질은 동시에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특성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견백동이'설도 철학적인 의미가 큽니다. 또한 혜시의 "날아가고 있는 화살은 움직이는 것도, 멈춰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이나 "한 척의 막대를 두고 이를 날마다 그 절반씩 잘라내면 무수한 시대가 지나도 다하지 않는다"는 구절 등 제논의 역설과 똑같은 역설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진시황의 중국 통일 이후 탄압을 받고 사라져갔고, 이후 중국 철학에선 논리 같은 추상적 개념보다 통치체제나 삶의 방향 등을 다루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철학만이 발전합니다. 이는 고대 중국의 찬란한 철학사가 이후 체계적 과학으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로 지적됩니다. 인도에서는 웃드요따까라 등 니야야-바이셰쉬카 사상가들이 연역법과 유비 추리를 결합시킨 논리학을 정립했고, 디그나가, 샹까라스와민, 다르마끼르띠 등 불교 유식(唯識) 사상가들 역시 논리학에 관심을 두고 깊이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논증을 구성하는 명제/진술 등의 내용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에 초점을 두어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추상적인 형식에 초점을 기울이니만큼 현대에는 당연히 수학적 기법과 기호 등을 도구로 삼아 이루어집니다. 실질적으로 학계에서 "논리학"이라고 할 때에는 형식 논리학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형식 논리학에서 쓰는 논리식은 일상에서 쓰는 말을 추상화시킨 것이지만, 일상 언어 표현과 형식 논리 정식 간에는 의미상의 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표준 논리의 논리식인 실질 조건문 p → q, p→q는 자칫 한국어 문장 "만약 p이면 q이다" 혹은 영어 문장 "If P, then Q"와 의미가 똑같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 의미상 다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논리학에서 '만약 p이면 q이다'를 p Ɔ q로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표준 논리 Standard logic. 동일률(ϕ→ϕ), 무모순율(¬(ϕ∧¬ϕ)), 배중률(ϕ∨¬ϕ) 등을 비롯한 전통적인 논리적 법칙들 혹은 공리들을 받아 들이는, 말 그대로 표준적인 논리체계. "고전 논리(Classical Logic)"이라고도 불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 및 고틀로프 프레게의 수리 논리학이 모두 표준 논리에 해당합니다. 철학과의 전공과목이나 수학과의 수리논리에서 명제논리와 1차 술어 논리를 시작으로 기본적으로 배우게 되는 논리 체계입니다. 이 과정에서 일상언어(혹은 수학의 언어)의 형식언어로의 번역, 형식 논리학의 추론규칙, 의미이론 등을 배우게 됩니다. 

비표준 논리 Non-standard logic. 표준 논리에 (i) 새로운 공리/추론규칙을 추가하거나 (ii) 표준 논리의 공리/추론규칙 대신 다른 공리/규칙을 채택한 언어 및 논리체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즉 비표준 논리에서 채택되는 형식언어들은 표준적인 형식언어들과는 다른 의미체계를 갖습니다. 그중 유명한 예시들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습니다. 다치 논리(many-valued logic): 명제/문장이 참(T)과 거짓(F) 말고도 다른 진리치를 가질 수 있는 논리 체계. 즉 이가원리 principle of bivalence)를 받아 들이지 않는 체계입니다. 대표적으로 3가지 진리치를 인정하는 3가 논리(혹은 3진 논리)가 있습니다.

퍼지 논리(fuzzy logic): 진리치가 참과 거짓만이 아니라 연속 폐구간 [0,1] 가운데 어느 한 실수이면 되는 논리체계. 즉 참과 거짓으로 딱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경우를 설명하기에 적합니다. 직관주의 논리(intuitionistic logic): 어떤 명제가 그 증명과 독립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라는 전제를 거부하는 입장입니다. 즉 배중률을 거부하며, 그 때문에 표준 논리의 일부 추론규칙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한 참 개념 대신 증명가능 개념을 쓰기 때문에, 임의의 명제 ϕ 의 참은 'ϕ은 증명이 가능함', 거짓은 'ϕ의 증명이 가능하면 모순도 증명이 가능함'으로 대체됩니다. 따라서 직관주의 논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직관주의 논리가 다치논리의 일종인 것은 아닙니다.

양상 논리(modal logic): "필연적이다", "가능하다" 같은 표현을 다루기 위해 표준 논리학에 양상연산자(modal operator)를 도입하여 만들어진 논리 체계. 시제를 다루기 위한 '시제 논리', 의무를 도입하기 위한 '당위 논리' 등 역시 양상 논리에 포함됩니다. 철학적 논리학(philosophical logic)이란 표준/비표준 논리를 막론하고 철학의 여러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논리 체계들 및 그에 관한 논리철학적 연구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예컨대 양상 논리는 타 분야보다도 철학에서 특히 많은 관심을 갖는 논리체계이며, 부사구 수식이나 사건 존재론 등에서 나타나는 논리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고안된 논리체계 또한 있습니다.(가령 의도를 연산자로 도입하는 체계가 있습니다.)

메타 논리 Metalogic. 메타논리학이란 논리체계에 대해서 성립하는 속성들을 탐구하는 논리학의 중요한 영역입니다.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알려진 괴델의 불완전성 증명 역시 이들 연구에 빚짐과 동시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타논리의 성과는 전산학이나 컴퓨터과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메타논리적 속성으로 완전성(completeness), 건전성(soundness), 조밀성(compactness) 등의 속성이 있다. 메타논리학의 연구영역으로 크게 4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계산가능성 이론(회귀함수 이론) 어떤 것이 기계적으로 계산 가능한지 혹은 결정가능한지에 대해서 탐구하는 분야입니다. 잘 알려진 튜링머신에 관련된 논의가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어떤 체계에서 주어진 문제가 튜링머신을 통해서 해결가능한지의 문제나 어떤 해결방법이 튜링머신의 해결방법과 동등한지 등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결정가능성(decidability)역시 큰 주제중 하나입니다.(결정가능성이란 어떤 체계에서 주어진 문장이 그 체계의 정리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기계적 절차가 존재하는가에 관한 문제)

모형 이론 어떤 체계의 언어표현의 의미에 대해서 다루는 분야입니다. 주로 1차언어의 표현의 의미와 그 구조에 대해서 탐구하는 분야이다. 주로 귀결개념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룹니다. 증명 이론 모형이론이 언어표현의 의미에 대해서 다룬다면 증명이론은 언어표현 자체에 대해서 다루는 구문론적 영역입니다. 주로 증명의 구조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집니다. 집합론 특정 조건에 맞는 원소들의 모임. 임의의 한 원소가 그 모임에 속하는지를 알 수 있고, 그 모임에 속하는 임의의 두 원소가 다른가 같은가를 구별할 수 있는 명확한 표준이 있는 것을 이릅니다. 수학적인 의미로 집합을 정의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수리논리 외의 분야에선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용어(무정의용어) 중 하나. 무언가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미 정의되어 있는 개념이거나 정의하지 않고 사용하는 개념인 것이 미리 있어야 하는데, 수학에서 그러한 '바탕'으로 대표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집합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는 집합이란 개념을 통하여 발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집합이란 개념의 이용은 현대 수학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으로 필요한 소양입니다. 과거 중고등학교 수학의 첫 단원이 집합이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집합이라는 개념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구성하는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국립국어원의 설명은 직관적 집합론(naive set theory)에서 받아들이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수리논리에서도 공리적 집합론에서도 집합이 무엇인지 정의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공리적 집합론에서 대표적으로 채택하는 공리계인 ZFC(선택 공리를 추가한 체르멜로-프랭켈 공리계)에서는 집합론에서 사용되는 모든 오브젝트가 집합이고, 공리들은 ∈ 에 관한 공리들입다. 또한 정칙성 공리 등을 통해 집합이 조건을 공리적으로 제한한다. 한편 NBG(폰 노이만-베르나이스-괴델 공리계)나 MK(모스-켈리 공리계)라는 공리계에서는 집합을 '다른 class(주로 '모임'이라고 번역된다)의 원소인 것'으로 일단 정의하기는 하고 class는 위에서 말한 직관적 집합론에서의 개념과 좀 비슷합니다. NBG나 MK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공리계들 또는 공리들의 관계를 탐구할 때 그 도구로써 '이러이러한 것만 집합이라고 새로 가정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살펴보기도 합니다. 왜 이런 복잡한 방식을 거치는가 하면, 집합 개념을 단순히 직관적으로 '어떤 성질을 만족시키는 것들의 모임'이라고만 해버리면 러셀의 역설과 같은 여러 가지 역설이 생겨 수학 구조가 붕괴되기 때문입니다.   

칸토어 이후의 수학은 기본적으로 집합론을 기초로 하여 성립돼 있습니다. 당장 수학의 가장 기초 공리계인 ZFC부터가 집합을 이야기하는 공리계이고(이는 NBG, MK등 다른 공리계도 마찬가지) 그 외에 자연수등 모든 수학적 대상이 집합의 언어로 서술되기 때문입니다. 대수, 해석, 위상 등등의 모든 이론을 시작할 때 집합이 들어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연속, 수렴, 이항연산, 컴팩트, 심지어 무한 등 수많은 개념들이 집합을 통하면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의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됩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직관적 집합론이 아니라 위에 서술한,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의된 집합을 더욱 심도 깊게 다루는 것이 (공리적) 집합론으로, 수학과 학부 또는 대학원 과정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영미권의 대학에서는 철학과의 전공 과목으로 개설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서양고대철학 원전읽기는 3월 첫 주에 법률 12권을 마지막으로 플라톤 대화편 읽기를 끝내고 3월 둘째 주부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섹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 중 범주론 명제론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들은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변증론, 소피스트 논박이 있으며, 이것들을 다 묶어서 오르가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르가논은 단일한 책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술들을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그리스어로 오르가논은 신체기관이란 뜻도 있지만 도구라는 뜻도 있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은 실제 대상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학문을 하기 위한 도구과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착안해서 후대 학자들이 오르가논, 즉 도구라는 뜻으로 붙인 겁니다. 근대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논리학을 비판하고 과학의 도구라고 생각한 귀납논리학을 정립하면서 자신의 책 이름에 노붐 오르가논(Novum Organon)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일본인들이 이 내력을 모른 채, organon을 증기기관과 같은 기관이라고 이해해서 신기관이란 엉뚱한 번역이 나왔죠. 이걸 또 우리나라 학자가 그대로 갖다 써서 현재 베이컨의 책은 신기관이란 근본없는 이름으로 번역이 나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기원후 4세기에 게르만 민족들이 대거 남하하고 서로마가 망하면서 유럽의 주인은 비기독교, 비라틴계의 게르만 민족이 됩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들을 기독교화하는 한편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문화 전통을 계승하고자 이들의 언어를 정리합니다. 구술어의 단계에 머물렀을 게르만어들을 문법적으로 정리할 때 도입된 도구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라고 합니다. 즉 서구어의 기본적인 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기초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동양과 서양의 언어적 차이 등을 언급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란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삼단논증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개념(이름)을 분류하는 논의입니다. 주어와 술어 형태로 된 명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것이죠. 이런 분류가 당연해 보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정립했기 때문에 이것이 서구 문법의 기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 범주에 대한 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구분하는 단위도 됩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언어에 대한 논의이자 존재에 대한 논의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근본전제를 함축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있던 시절에 저술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 저술에는 플라톤의 형상이론에 대립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별화된 형상이론이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명제론은 기본 단위인 개념들이 주어와 술어 형태로 결합되어 형성된 명제를 다루는 논의입니다. 명제들의 종류와 성격 등에 대한 중요한 논의가 담긴 책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철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수제자이지만, 그의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과는 정반대를 지향합니다. 화가 라파엘로의 유명한 그림인 아테네 학당을 보면 정중간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사람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한사람은 하늘을 가리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땅을 가리키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인데, 땅을 가리키는 것은 그가 현실주의자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은 그가 이상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을 라파엘로는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두사람 모두 이데아를 말하였지만,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과 분리된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현실에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지만, 그들의 철학은 물과 기름과 같이 서로 융합될수 없는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포함하여 오늘날 학문의 기초가되는 거의 모든 것은 만들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그가 저술은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있어서 백과전서적 학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현대지성에서 출간된 수사학 또한 그의 저술중 하나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책에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영향을 끼치기 위한 언어기법에 대해 얘기합니다. 오늘날의 수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책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기술들에 관해 설명합니다. 하지만 설득의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기호등, 인간에 관해 먼저 생각해 보야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이책은 1부에서는 수사학에 관한 정의등을 얘기하고, 2부에서는 주로 인간의 마음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3부에서는 글쓰기나, 논증방법등 상대방을 설득하는 기법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책은 수사학에 관한 책이지만, 2부에서 설명하는 인간의 감정별 유형을 읽어보면 인간의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이 들어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앞에서 위선을 떨지 않은 자를 좋아한다. 자신의 나쁜 점까지도 얘기하는 그런자들 이다. 앞서 말했듯, 친구들 앞에서 통상 잘못이라고 여기는 실수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치를 느낀다면 그들은 친구가 아니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친구일 가능성이 높다이처럼 이책을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아주 유용할 입니다. 그런점에서 이책은 한번 읽어볼만합니다. 이책은 수사학과 아울러 인간에 대하여도 생각해 볼수 있었던 점에서 좋았습니다.

 

책 제목에서 주는 사전적 단어의 정확한 뜻을 살펴 보았습니다. 설득(說得)이란? 명사로서상대편이 이쪽 편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여러 가지로 깨우쳐 말함을 뜻하는것이고 논리(論理)란? 명사로서 1. 말이나 글에서 사고나 추리 따위를 이치에 맞게 이끌어 가는 과정이나 원리. 2. 사물 속에 있는 이치. 또는 사물끼리의 법칙적인 연관을 뜻했습니다. 같은 말로 논리학(論理學) (바른 판단과 인식을 얻기 위한 올바른 사유의 형식과 법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있습니다.

 

이렇게 제목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설득의 논리학>은 사물 속에 있는 이치나 법칙등의 연관을 들어서 상대편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가 되어 줄 수 있을거 같습니다. 작가는 소크라테스가 즐겨 사용하던 예시를 통해 설득하는 예증법을 기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베이컨의 귀납법, 가추법, 쇼펜하우어의 토론술등 10가지의 말하기와 글쓰기를 하는 논리 도구들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생활속 곳곳에서
끊임없이 설득을 당하거나 설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려선 부모님께 용돈을 타기 위해 적절한 이유와 설명이 필요했었고 학교에선 학업에 관련하여 또 수많은 논리적 논쟁을 했어야 했으며, 육아에선 훈육을 위해 자녀를 설득해야 하는 일들이 생겼으며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논의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비단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평생을 끊임없는 설득과 선택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설득의 논리학>은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전달하고 싶은 사람이나 논리싸움에서 매번 밀리는 사람들에게 꽤 큰 도움이 될거라고 하는대요 적어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선 논리적 사고방식은 반드시 많은 수양을 필요로 하는것만은 확실한거 같습니다. 마지막 논리학 길잡이에서 진리와 윤리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좋았습니다.

 

논리학은 "무엇이 올바른 논증이며, 올바른 추론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발한 학문입니다. 연역추론과 귀납추론이 논리학에 속하는 대표적인 주제이며, 논증 및 추론을 구성하는 명제, 그리고 이를 다시금 구성하는 개념 등 역시 논리학의 전통적인 연구 주제입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등장하는 "얘기가 논리적이네!" 같은 말도 이런 본래의 정의를 잘 반영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고안한 학문이며, 19세기 유럽 조지 부울, 고틀로프 프레게, 버트런드 러셀등의 업적을 통해 수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는 20세기에 수리 논리학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논리학, 특히 형식 논리학은 수학, 컴퓨터공학, 철학, 언어학등에서 걸쳐 두루두루 연구되고, 따라서 대학 과목 역시 여러 대학교의 수학과, 컴퓨터공학과, 철학과에서 두루두루 개설됩니다. 수학의 경우 논리학은 '수학 기초론'으로서 연구되는 편이고, 컴퓨터공학의 경우에는 논리회로부터 시작해서 프로그래밍 언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응용됩니다. 논리학을 전통적으로 연구해온 철학에서 역시 형이상학, 수리철학, 언어철학 등 각 분야에 접목됩니다.

 

비형식 논리 일상적으로 우리가 말하고 듣고 쓰는 말이 타당하고 합당한 논증으로서 잘 성립하는지 따지는 것입니다. 즉 흔히들 비형식 논리를 기준으로 따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가령, <순환논증 오류>, <논점일탈의 오류>, <인신공격의 오류>, <피장파장의 오류>,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 등이 비형식 논리학에서 다루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비형식 논리는 구체적인 말의 내용을 따지는 것이므로 수학이나 기호 등을 동원하는 형식적인 방법론을 잘 취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비형식 논리학은 좁은 의미의 "논리학"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잦다. 하지만 시험에서 필요한 경우도 있거니와, 다수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써먹기에는 형식 논리학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분야입니다. 흔히 대학의 교양 과목으로 개설되는 <비판적 사고>나 <논리와 사고> 수업에서 주로 비형식 논리를 중점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논리적 오류 항목에 비형식 논리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왜 그렇게 많은 조각들을 빠뜨리는 걸까? 둔감한 신체, 그것이 문제다.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을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 ‘때아닌 것(Unzeitst)'이며 미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미래의 철학‘이라고 간주할 때, ’미래‘는 과거나 현재 다음에 오는 시간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때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만 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시간이다.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있다. 천 개의 건강과 천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있다.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천 개의 방식이 있다. 갈 길을 못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게 아니라 넘쳐나고 있다.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수 있었지. 2부에 나오는 베버의 근대 허무주의 비판과 딜레마와 차이에 대한 회피와 포섭의 정치학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그 끝까지 읽었지만 니체와 무관한 부분이고 서로 떨어져 있는 별도의 것이기에 제외하여 취급하지 않겠다.

우리는 일을 시작으로 사회생활은 시작된다. 진정한 나로서의 성장 하기에는 만만치 않다. 회사는 언제나 일방적이며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보통의 우리는 유치하다거나 쪼잔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원하는 것도 손해 보는 일에도 아무 말도 하지도 못한 채 지낸다. 많은 일에 대한 스트레스, 일만큼 받지 못하는 처우와 냉대로 가닿을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쳐지는 고통을 느낄 때마저도, 남자라는 이유로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당연한 듯해야 할 일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아주 당연하게 추구해온 꿈조차 멀어지곤 했다. 당당한 목소한 번 내지 못하고 그렇게 일상이 된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쉴 새 없이 경쟁하고, 쉴 새 없이 비교하고, 상대를 미워하고, 친구조차 견제하면서 외롭게 지쳐 가는 것은 아닌지.

경쟁과 비교에서 조금이라도 밀리면, ‘왜 난 이렇게밖에 못할까?’ ‘나는 왜 안되는 걸까’라는 자책과 후회가 엄습한다. 수시로 지치거나 자책이 깊어지면서, ‘내가 왜 살아야 하나?’ ‘무슨 낙으로 하루를 버티나?’라는 허탈한 물음을 묻곤 한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어깨는 축 처지고 지쳐만 간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멀어져 가고,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믿음도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바뀌고 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못난 자신이 원망스럽고, 그나 있던 자존감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난 도대체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이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된다.

‘아! 나조차 나의 편이 아니었구나.....’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본 적이 없는지 모른다. 그래서 수시로 몰려오는 그 많은 물음과 한숨을 꾹꾹 누르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절규는 현재 삶에 대해 불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 니체가 철학에 보내는 권고는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 운명애! 니체는 운명애를 사유와 삶에 관한 하나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파괴적 행동도 아니고, 숙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적 행동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행위다. 

니체는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랑할 만하게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운명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 강한 삶에 대한 긍정이 있을까.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삶을 사랑하려거든 삶을 맛보는 혀부터, 냄새 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까지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천 개의 길이 있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금지되어온 모든 것들을 찾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식량을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니체가 말한 삶의 철학, 즉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으로서의 철학인 것이다. 니체에게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

낙타는 잘 견디는 정신의 표상이다. 낙타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맡아진다. 주어진 가치를 묵묵히 수행하기만 하는 낙타는 “선악에 있어 창조자가 되고 싶은 자는 먼저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이-아(l-a)’라고 우는 나귀와 같은 족속으로, ‘야(Ja, 긍정)’에 대한 잘못된 발음 즉 긍정의 정신에 대한 오해를 상징한다. 이에 비해 사자는 거대한 부정의 정신이다. 낙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사자는 이해한다.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터전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거대한 용이 나타나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모든 가치는 내 몸에서 빛난다...... ‘너는 해야만 한다 (당위와 의무)’만 존재한다‘고 말할 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를 외친다. 그러나 사자 역시 긍정을 알지 못했다. 사자는 부정조차 긍정하는 정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나는 하고 싶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것,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는 존재 자체로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한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하나의 놀이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다.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논다. 눈을 뜨자마자 노는 것을 찾고, 밥을 먹자마자 다시 노는 것을 찾는다. 놀이의 목적은 놀이 그 자체다. 놀이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다. 물질적 관심이나 소유욕보다 먼저 즐거움과 재미, 기쁨이 앞선다. 그 기쁨이 놀이를 선택하는 동기이거나 놀이를 지속하는 동력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서, 발랄한 몸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어른들에게조차 놀이는 그런 것이 아닐까.

잊지 말자! 세상에는 기쁨도 있고 순탄함도 있고, 발전도 있지만, 슬픔도 있고 역경도 있고 뒷걸음도 있다. 안정도 위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은 필연적인 것만큼 우연으로 가득한 것이 삶이다. 삶에 있어서 선착장에 묶어둔 배를 미지의 바다로 내보내라! 그대와 견줄만한 인간들, 그리고 그대들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살아라!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다. 다시 아이들에게 가자. 어린아이가 한없이 자유롭고 한없이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이가 온몸으로 생각하고 온몸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모든 순간, 몸 그 자체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라"라고 말한다. 나는 오직 신체일 뿐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이란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어진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말이 아닌 몸으로, 모든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게 욕구를 분출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춤이다. 인간적, 사회적, 도덕적 속박들일랑 모두 다 쓸어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춤추고 뛰어보자. 춤이야말로 모든 아이다움이 응축된 행위다. 여기서의 춤은 정해져 있는 규칙을 따라 추는 춤이 아니다. 내 몸이 가지고 있는 템포와 리듬만을 의지한 채, 오직 자신만의 몸에서 울리는 말로 되지 못한 모든 것들을 노래하는 행위다. 그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천진난만한 자유, 오직 자신만의 욕구와 몸의 흐름에 따라 발산되는 손짓과 발짓, 리듬에 맞춰 역동하는 심장과 그 심장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즐거움, 춤사위 하나하나에 날려 보내며 망각되는 슬픔, 아쉬움, 두려움, 이것이 바로 춤이다. 춤이야말로 타고난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표현이고 노래다.

춤은 그래서 아이다움의 결정체이고, 가장 고양된 초인의 행동이다. 암담한 운명에 직면해서도 이를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긍정하는 강인함, 그렇게 운명과 맞서 싸우는 위대한 영웅의 면모를 발휘할 수 있는 운명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가꾸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의 말처럼 수없이 반복되어도 기꺼이 다시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것, 그렇게 나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물음들에 망설이지 않고,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너의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바라는가?"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추다 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 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끌어 가는 삶은 천진한 아이들의 놀이처럼 춤을 추는 데 있다.

허무주의란 말을 정의하면 "너희가 믿는 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란것을 인식하는 것"1887년 니체는 다가올 두세기 동안 허무주의가 도래할것을 예언 했습니다. 니체에게 큰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체가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한 것은, 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던 모든 형이상학적 근거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니체가 죽은지 120년이 지나 신의 죽음이란 말이 충격적이지 않지만 제가 생각할때는 신의 죽음은 반기독교 적인 단어라기 보다는 역사의 흐름이라 여겨집니다. 인간이 세상을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신을 창조했다면 17세기에 뉴턴이 운동 법칙을 발견했고, 기차 등 수많은 신기술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19세기에는 신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신을 죽였습니다.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으로 생존이 목적이 되는 삶을 살지 말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합니다. 몸을 부정하고 형이상학적인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삶도 비판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중심을 잡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모든 사람이 소비에 미친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자기만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신의 죽음이 평범화되고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은 21세기 세속화 시대.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통해,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삶의 주인이 되고, 삶의 예술가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삶에 대한 자세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고통에 초연해지기 위해서는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없애야한다.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에서 모든 고통이 출발된다."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없애다 = 자살 ??

자살에 대한 정당화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닌 본인의 삶에 대한 회피라고 말합니다. 니체의 삶에 대한 자세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신은 죽었다. 현생의 고통이 사후 우리를 천국이나 지옥으로 이끌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우리를 '능동적 허무주의'로 이끌어나갑니다. '능동적 허무주의'란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신의 굴레(니체는 이를 종교에 의한 우리의 삶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말함)를 벗어던지고 각자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체와 고흐는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인물들일 것입니다. 각자 철학과 미술계에선 최고의 자리에 있는 유명인으로 '신은 죽었다'와 '별헤는 밤'이라는 강렬한 아이콘으로 최고의 존재감을 가진 명사들입니다. 이 둘 사이엔 유사점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가장 인기있고 영향력이 많은 철학가와 예술가지만 니체와 고흐는 둘 다 살아생전엔 비주류였고, 그다지 인기도 없고, 유명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니체는 생전에 저서가 30부 정도만 팔릴 정도였고, 고흐 역시 일생동안 단 한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노력파’ 천재였던 니체와 남들보다 늦게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했던 고흐 역히 '노력파' 천재였습니다. 고흐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서 주위 사람들이 만류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니체와 고흐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유명하지도 않고 인기도 없었으니 생계유지도 어려워서 니체는 친구들의, 고흐는 동생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또 두 사람은 모두 말년에 정신착란을 일으켰습니다. 니체는 정신착란에 시달리고, 우울증과 조증을 겪으면서도 많은 저서를 써내려갔고, 고흐 역시 귀를 자르고 고향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갔을 때 최고의 작품들을 완성시켰습니다.

 

니체는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모든 기존의 가치에 대항하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태를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개인에 간섭하는 절대적 가치체계에 대항하는 자세를 가지고 기존의 가치를 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니체는 허무주의와 싸웠고, 현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니체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아모르파티’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어려움까지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는 지적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세속화된 시대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자들의 술수를 신랄하게 까발렸습니다. 그리고 어리석게 끌려 다니는 대중이 깨어나도록 매섭게 외쳤다고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계몽가였던 니체는 스스로 망치를 들고 철학을 하겠다고 천명했으며, 스스로를 다이너마이트라고 말할 정도로 선구적이였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 철학가였습니다.

 

고흐의 행동원리는 고난이 주는 힘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좌절과 고난에 시달렸던 예술가입니다. 우스개소리로 고난이 예술혼을 불러일으킨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말이 가장 적합한 예술가가 바로 고흐일 것입니다. 평생 그림 한장 팔지 못하는 가난한 화가로서, 스스로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까지 일생을 비루하고 고단하게 살았습니다. 고통과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폭발적인 열정으로 그림을 그린 고흐. 특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고흐의 그림체가 최고 정점에 이른 시기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대표작들이 많이 탄생하였습니다.

 

평생을 비주류로,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삶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 위대한 철학자 니체와 우울함과 좌절, 고통과 고난을 예술혼으로 폭발시킨 위대한 예술가 고흐는 그 존재만으로 힘든 이에게 따뜻한 위로가 됩니다. 그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그들은 고난에 굴하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두 위대한 철학가와 예술가의 생을 돌아보며 영혼의 위로와 치유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책은 니체의 사상이 담긴 문구 한구절과 고흐의 그림을 한편씩 묶어서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니체의 글을 삶, 아름다움, 지혜, 인간, 존재, 세상, 사색, 신앙, 예술가의 총 10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그 옆에 고흐의 작품도 함께 실어놓았는데 꼭 그 글과 관련된 그림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니체의 사상을 마치 그림으로 보여주듯 그 문구에 정확히 상응하는 그림이 짝을 지어 나오기도 하지만 그저 배경 그림처럼 삽입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니체의 문구와 고흐의 그림이 정확히 싱크로 될 때 그 감흥은 폭발합니다. 가령 가장 마지막의 '나의 발걸음은 훨씬 단단해졌다'에서는 앞으로 더욱 고독해지고 이전보다 험난해진 길을 걷게 되겠지만 발걸음은 훨씬 단단해졌고 확실해졌으며 용기로 인해 성장했다는 굳은 마음이 보이는데 옆에는 귀에 붕대를 감은 고흐의 자화상이 보입니다. 그 그림 속의 고흐에게서도 역시 같은 마음이 엿보입니다. 니체와 고흐 두 거장의 철학과 예술의 콜라보레이션. 니체가 집필한 책의 철학적 핵심내용을 모아서 읽어보는 것도 의미있고, 고흐의 작품을 이정도로 많이 접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한 책입니다.

 

니체 철학의 방대함과 난해함 나를 위축시킵니다. 하지만 니체의 철학에 대해 전반적인 것들을 살펴볼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됩니다. 어렵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을 멀리 하기에는 너무 좋은 책이입니다. 저자 고병권님의  책을 통해 니체 철학 전체의  방대한 내용을 다가가 이해할  있도록 이끌었습니. 니체의 철학을  권으로 이해하기에는 분명 한계를 느끼고 습니. 하지만  권의 책을 읽고 덮을 , 한결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낄  있었다. 뿌듯했고 즐거웠습니.

 

고병권 님이 전달하는 니체의 철학, 체계적으로 설명되었으며,  정리되었습니. 니체와  철학의 선지식에 놀랐습니. 그러므로 공부에 서툰 이들에게도    니체 곁으로 다가갈  있지 않았나 생각합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쾌하게 전달합다. 삶을 긍정할 , 지식의 경계를 확장하라.  책은 2001년에 출간되었습니.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책입다.  책을 읽기 위해  명이  권의 책을 카피하여 복사본을 만들어 읽었습니. 그래서일까  깊이  가슴에 다가왔던  습니.

 

제가 책을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 보다 분명하고 명료함을 얻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공감하게 되었습니. 구성면으로   1부에서는 니체가 즐겨 썼던 핵심 단어에 대한 연결과 흐름을 갖고 이끌었습니. 하지만 번번이 이해하는  한계가 있었고 놓치고 지나가야 습니. 삶을 사랑하는 철학에서부터 시작을 하여 강한 자와 선한 , 투시 주의와 광학 의지, 권력의지  의미를 조금이나마 가까이하게 되었습니신과 죽음, 생성과 소멸, 시간의 문제 등에 관한 니체의 고찰은 돋보였습니.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해 니체가 이미 오래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했습니.

 

천 개의 

눈처럼 쉽게 길러지는   있을까? 광학의지 혹은 시각체계-사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 훈련,  것을 작게 보는 훈련,  개의 눈으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개의 눈으로  가지 진리만 보는 훈련, 그러나 여전히 많은 눈들이 있다. 진리를 묻는 스핑크스도 눈을 가졌고, “인간이라고 답하는  오이디푸스도 눈을 가졌습니. 따라서 아주 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어떤 진리도 습니.

 

천 개의 

아직 밟아보지 못한 천 개의 작은 길이 습니.  개의 건강과  개의 숨겨진 삶의 섬들이 습니. 세계를 만들어 나갈  있는  가지 방식이 남았습니.  길을  찾았다고 그러나 길은 없어진  아니라 넘쳐나고 습니. 길의 부재가 아니라 과잉으로의 카오스, 그런데 반듯한 길이 사라지고 미로뿐이라고 덕분에 길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줄 기쁨을 숨겨둘  있었습니다.

 

 개의 기원

역사의 뿌리나 열매를 신성화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묻혀져 있어야 했는가그러나 모든 사물의 기원은 천겹이다.” 지혜로운 탐사자라면 무지하고 소심한 자들이 지나친 많은 것들 속에서도 파편을 모을  있을 것입니다 겹의 주름 속에 숨겨진 사건들이 햇빛 속에 놓이게   신성한 것들의 거짓이 떨어져 나갈것입니다.

 

 개의 젖가슴

과학적 인식이라고가치 중립이라고? “남성도 아니고여성도 아니고양성 공유자도 아니고다만 중성일 뿐인 인간들성적 불능자들.” 대낮같이 밝은 인식을 떠들면서도 밤만 되면 열린 창을 훔쳐보기 위해 지붕 위를 싸돌아다니는 수고양이들인식으로부터 욕망을 몰아내겠다고너희는 욕망의 창조성을 모릅니다너희는  바다의 욕망이 태양을 향해서  개의 젖가슴으로 부풀어오르는지 모릅니다너희는  태양이 그것에  맞추고 애무하는지를 모릅니다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입니다!

 

 개의 주사위

벌써부터 평균을 구하지 말라우리들은 세계라는 도박대 위에서 판을 벌이는 도박사들우리에겐   던져지는 주사위가  소중하다겨우  우리는 벌써   번째 주사위를 주시하고 습니여섯 개의 면밖에 없다고우리는 동전의   면만 가지고도 무한한 세계를 만들어   습니자유 정신의 소유자들이여   번의 주사위를 던져라세계는 너희를 위해  개의 섬을 준비해두었습니.

 

 개의 화살

아포리즘은 모두 화살이다. “아포리즘과 화살.”그것들은 읽혀지기를 바라는  아니라 쏘아지기를 바랍니다누구든 활을 들고 쏘아라. “급소를 맞춘 화살의  떨림을 보라 흔들림을 보라.” 아포리즘들만이 아닙니다모든 책들이 망치 되거나 다이너마이트 사용되기를 바랍니다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개의 화살이 들어 있습니다저기 니체하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습니다!

 

 개의 가면

무릇 심오한 인간들은 가면을 좋아합니다.” 가면 뒤의 얼굴가면만이 진정한 얼굴이며가면 뒤에는 다른 가면이 있을 뿐입니다. “호기심 많으신 분이시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요주시려거든 부디...  하나의 가면2 가면을 주시오.”허락하신다면 3 가면도..... 진정한 니체의 얼굴이 보고 싶다구요여기 니체의 가면이나 하나 받으십시오.

 

 개의 이야기

아직도  개의 이야기가 남았습니요리사 니체가 소개하는 우연을 냄비에 끓이는 -나는 어떤 우연이든 나의 냄비로 끓입니다낚시꾼 니체의 독자 낚는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시바늘입니다우주 비행사 니체의 타임머신 타지 않고 시간을 넘나드는 -나는 미래 속으로 날아갔었습니다이버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 가보지 못한 심연으로 잠수하는 -길게 숨을 쉬고 나서 잠수하라그래야만 깊은 바닥까지   있으리라아직도 니체에 관한   밤낮의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플라톤의 '개념', 이것의 이전에는 소크라테스의 공이 먼저 있었습니다. 바로 이 '개념'에 해당하는 것을 도출하는 과정이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솔직히 이렇게 딱딱하게 공을 각각 나누어 누군 뭐했고 누군 뭐했다 식의 역할 놀이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어쨌든 누군가가 그것을 했다는 것이니까요. 뭐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그 '개념'을 도출하는 과정인 산파술은 대체 무어냐? 산파술의 구조는 딱보면 변론술과 차이가 없어보인다만, 그 결정적 차이점은 이곳 저곳에 흩뿌려져있지요. 그것에 대해 살펴봅시다.

 

산파술의 경우, 그 목적이 화자가 청자와의 말싸움에서 이기고 그로써 절대진리에 대한 부정을 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상대자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좀 더 명확히 정리시켜주는데 그 목적을 둡니다. 소피스트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없다에 근거해 변론술을 펼친 반면, 소크라테스는 "개인별로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르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는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사람들마다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은 산파술을 통해 끌어낼 수 있다."고 보았죠. 즉, 소피스트보다 한 단계 진보된 형태가 소크라테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서 소크라테스의 직제자 플라톤의 향연에 보면,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를 포하만 수십명의 제자가 진리에 대해 말싸움이 붙어, 소피스트 모두가  소크라테스에게 박살났다는 기록이 대화편에 남아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이어지는 동안, 그 질문에 답변하는 자는, 정리되지 않은 채, 막연히 머리속에만 떠돌던 내용들이 차분히 정리되게 되고, 그로 인해, 진리의 지식에 좀 더 명확히 다가갈 수 있으며, 그래서 산파술은 화자에 의해 일방적인 결론을 도출한채 끝나는 소피스트식의 변론술과는 달리, 어느정도 명확하게 이끌어내진 상대자의 답변으로서 끝을 맺게 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의 차이점입니다. 즉 변론술의 주체는 화자이지만, 산파술의 주체는 청자입니다. 이성을 통해, 청자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 그러는 과정에 도와주는 입장인 산파술(산파는 아기를 대신 낳아줄 순 없지요. 다만 도와 줄 뿐이죠. 이렇듯 산파술이란, 진리에 대한 지식의 깨우침은 스스로에 의한 것이며, 소크라테스와 같은 질문자는, 다만 그 스스로의 깨우침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인 대화법입니다.)을 그의 주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이 산파술에 의해 도출된, 대상에 대한 명확하고 공통적인 본질이 바로 '개념'이며, 이런 개념의 철학은 2500년 서양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중요한 창이 되어버립니다.

 

서양철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논리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말장난 같으면서도 유추와 비유 등을 사용하여 다른 이들을 설득해 나가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그 시대에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절실한 덕목일 것입니다. 책은 메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세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며 열린 재판에서 소크라테스가 변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차, 2차, 3차에 걸쳐 소크라테스는 청년들과의 문답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음을 변론하지만 결국 그에게는 사형이 선언되어 감옥이 갇히게 됩니다.

내게 사형을 선고한 아테네 사람들이여, 제우스를 걸고 맹세하건대, 내가 죽자마자, 여러분이 내게 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형벌이 여러분을 덮칠 것임을 나는 분명히 말해두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게 이렇게 한 것은, 나를 죽이면 여러분의 삶이 비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그런 것과는 정반대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그런 사람들을 억제해 왔습니다. 이제 그들은 나이가 젊기 때문에 더 가혹하게 비판할 것이고, 여러분은 더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2500년 전의 인간사와 현대의 인간사는 어쩜 이렇게도 닮아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예언한 이 저주는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외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을 빼내기 위해 친구 크리톤이 찾아오고 이 둘의 대화가 바로 크리톤편입니다. 크리톤이 자신의 권력을 모두 사용하여 소크라테스를 구출하고자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원칙을 비유법으로 설명하며 친구를 설득하고 크리톤은 슬프지만 받아들입니다. ​파이톤편에서는 아테네 감옥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날 새벽부터 소크라테스의 최후까지 지켜 본 파이톤이 에케크라테스에게 그 날의 대화를 전해줍니다. 삶과 죽음, 몸과 영혼.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소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로서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닌 다른 시작이었고 오히려 신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의 추종자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논리와 인격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한발한발 논리를 전개 할 때마다 그는 다른 이의 확인과 이의를 묻고, 들으며 자신의 견해를 확장하고 다시 고민합니다. 참된 진리의 여부를 떠나 소크라테스의 문답은 점차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만 찾으려는 현대사람들에게 한번쯤은 멈추고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짧게 줄인 말들과 순간적인 자극을 쫒아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밀쳐내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소크라테스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생각해봅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낀바가 많았습니다. 산파술이라는 교육방법이 수안머에서 말하고 있는 가장 완벽한 코칭이 아닐까 합니다. 제자 스스로 진리를 찾아 가게 하기 위해 끝임없이 의문을 제시하여 사고의 경지를 최상의 상태를 유지시키려면 스승은 제자의 사고의 흐름을 함께 해가거나 이미 그 과정을 선험했을때 가능하기에 올바른 산파술(코칭)을 실현하기 위한 스승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보여집니다.

 

읽고나서  불교 선종에서의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 중의 하나인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산파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승이 제시한 답도 없는 화두에 빠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몰입의 경지(깊은 명상)에 들어가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답을 찾아서(돈오를 경험) 다시 스승에게서 깨달음에 대한 검증을 받는 중에 끝임 없는 선문답이 오가고  깨달음에 도달하였다는 인정을 받은 후에는 (사실 깨달음은 누가 검증해 줄 수는 없는 것이기에 깨달았다는 검증이라기 보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즉 돈오의 경험과 깊은 명상에 도달 할 수 있는 경지를 인정 받는 것입니다.) 다시 스스로의 화두를 정해 끝임 없이 정진해 가면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코칭을 통해  학생이 몰입  속에서 문득 스치듯 떠오른 실마리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돈오와 같고, 그러한 경험을 한 학생은 스스로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어  코칭의 마지막 목표인 학생 스스로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갈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주는 것이겠죠. 수학에서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인 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에 도달 할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란 화두를 던져 봅니다.

 

돈오점수 [頓悟漸修]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말. 이에는 그 이전에 점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돈오 후에 점수한다[先悟後修]는 주장이 있다. 당(唐)나라 신회(神會)의 남종선(南宗禪) 계통은 후자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이후의 선종은 주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돈오점수론’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오(悟)’를 햇빛과 같이 갑자기 만법이 밝아지는 것이고, ‘수(修)’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이 점차 밝아지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면서, 만일 깨우치지 못하고 수행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수행이 아니라 하여 선오후수의 입장을 강조하였다. 
 

돈오돈수 [頓悟頓修] 불교에서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라는 뜻으로, 단박에 깨쳐서 구경각(究竟覺;궁극적이고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경지)에 이름으로써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가르침 속에 언급되었으며, 한국 현대불교에 큰 자취를 남긴 성철(性徹)이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반박하며 제기함으로써 큰 논쟁을 일으켰다. 고려시대 지눌(知訥) 이래 한국불교 수행법의 주류로 이어져 온 돈오점수는 단박에 깨친다는 점에서는 돈오돈수와 같지만, 깨치고 나서도 점진적으로 수행하여야 깨침의 경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돈오돈수는 깨치고 난 뒤에도 더 수행할 것이 남아 있다면 진정으로 깨치지 못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귀납법과 실천지를 이끌어온 위대한 학자 중 1명이십니다. 이렇게 위대한 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겠죠? 플라톤도 그중에 1명이였습니다. 플라톤은 문답법을 완성시켰고, 문답법으로 이데아론을 완성시켰습니다. 이데아는 현실에 아쉬운점이 없는 완벽한 이상을 의미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는 초현실적인 절대적 참실재라고 생각했고, 우리의 영혼은 세계 이데아에 위치했을때 불멸하고, 이데아를 인식하기 시작할때부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플라톤은 학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학교의 이름은 아카데미아로, 현재 학원의 아카데미의 어원이 된 단어입니다. 플라톤도 매우 매력적인 남자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따르던 충실한 제자였습니다. 플라톤은 충실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카데미아의 스승 자리를 물려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졸업하지 않고 몇십년을 기다립니다. 근데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신하고 스승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줍니다. 화가 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론의 허점을 공격해, 새 이데아론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이데아론은 현실속에 이데아가 위치한다는 일원론이고, 인간이 이데아를 실천할수 있고, 이를 위해 실천과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이데아란 어디에 위치해있을까요?

 

세간에서는 플라톤을 신의 경지에 이른 철학자로만 알고 있다. 왜냐하면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 고전 숭배 사상의 영향일 수 있다. 하지만,과연 플라톤이 진정 필로소피아를 실현하려고 했던 사람인지는 의문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그의 성장 배경이 된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기원전 4 세기 경 아테네의 정치 현실을 먼저 살펴본 후 그의저작들을 면밀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플라톤

 

플라톤이 태어날 당시인 기원전 424/3 년은 굉장한 전쟁의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신 해상제국인 아테네 제국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아테네는 해상 전투를 제외한나머지 육상 전투에서 스파르타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점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아테네는이 시기가 되면 그들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암피폴리스가 스파르타의 수중에 넘어간 시기였기 때문에 사실상 아테네의 정치체제에 이미미 대다수의소피스트들과 부유층들이 의문을 품고도 남을 시기였ㅅ,ㅂㄴ;디/

 

이 중에 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실아테네의 귀족층은 그들의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시민들에비해 완벽하게 누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귀족층은 스파르타 혹은 다른 도시국가의 과두정을선호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투키디데스의 유일한 저작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와 The Old Oligarch, 그리고크세노폰의 헬레니카와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과두정 사회에서는자신의 위치인 귀족을 더 우대하기 때문이었고 그들은 민중은 그저 우매하고 무식한 사람들로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과두정은 아테네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존재하던 체제로 상당한 많은 아테네의 지식인들과 귀족들이 이 정치체제를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2. 플라톤의 이데아의 허망함

 

그런 이유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달리 귀족층을 옹호하는 글들을 그의 스승의 사후에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특히, 플라톤의 저작인 공화국에서 이런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이데아의 개념을 생각한다면 절대 불변의 진리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데아 이론 자체가 전세기 철학사를 통틀어서 플라톤주의로 인해 고대 로마, 크리스트교에선자연주의 철학으로 발전이 된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칼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말했듯이 자연의 개념은 과학 실험을 통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절대불변의 법칙은 성립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으로 생각한다면 이데아는 자연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닌 사회 구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서의개념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계층자체가 귀족이였기 때문에 과두정 혹은 왕정을 선호했을 가능성이높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정치체제는 그가 시라쿠사에 머물 당시 과두정의 나름대로의 효율성을 민주정에 대비해서봤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몬 아테네의 민주정보다 그의 눈에는 아테네 민주정 이전에 있었던정치체제가 가장 이상적인 체제였을수도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플라톤은 항상 시간의 흐름이 지날수록 이데아의 존재자체가 희박해진다고 항상 그의 저작인공화국을 포함해서 여러저작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자신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과두정 혹은왕정이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 통치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고 민주정 내에서의 우매한 대중들이 아테네 사회를 타락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회를 목격한 플라톤이 만들어낸개념이 철학왕이라고 봐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 철학왕이 그리스 도시국가의 왕 혹은 독재자처럼 특정부류의사람들만 교육시키고 서민들을 카스트제도로서 차별대우하는 것이 공화국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테네의 민주정자체가 무조건 옳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테네가 민주정을 채택함으로서 시민들이 자유의 방종을 이용해서 동맹 도시국가들을 노예로 만들고 펠로폰네소스동맹과 자주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차별적 민중들의 반란은 플라톤으로서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30년 전쟁은 아테네를 비참한 지경까지 만들고 자신의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플라톤으로서 과두정을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로보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있어서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이 남겨주는의미는 무차별적 민주주의의 위험성입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이데아 이론으로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위험성을과두정의 이상화를 통해 알리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아테네의 시민이었기 때문에 아마시민의 통제가 아테네에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을수도 있습니다. 지금 사회에서도 이런 민주주의의 방종이 곳곳에서일어나는 것만 봐도 플라톤의 주장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과도한 세월호 사태에 대한 집착, 과도한 의견의 자유로 인한 국가 정체성 파괴 등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안하고 무조건 플라톤의 이데아이론을 따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플라톤은 자신의 이론을 통해 아테네의 사회가나아지기를 바랬던 것이며 민중의 통제의 중요성을 위해 이데아이론을 만들어낸 것이지, 절대 그가 과두정을완벽히 지지했다고 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가 소크라테스에 관련된 일화들이아테네의 민주정 하에서의 시민의 가치를 담은 글을 플라톤의 이른 저작들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 대해서 폭넓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자연히 새롭고도 근원적인 의문점이 하나 생길 것입니다. '각기 존재하는 이데아들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즉 이데아가 그러하게 존재하도록 만든 근원적 이유에 대해 플라톤 또한 깊은 생각을 했고, 따라서 이데아의 원인이 되는 궁극적인 어떠한 것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발견해냈지요. 바로 선(善)입니다.

 

 선이란 쉽게 이야기 하자면 좋음이자, 존재가 지향해야할 올바른 방향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이데아들이 존재하게끔 하는 이유이지요. 이데아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더 좋고, 또한 그것들이 그러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이고, 따라서 이데아들은 선, 그리고 선의 이데아의 이러한 목적에 따라 존재해나갑니다.

 

 가령 나무는 왜 그러하게 존재해야 할까요? 그리고 다른 수많은 존재들이 있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해당 존재가 그러하게 존재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고, 이렇듯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의 이데아가 가지는 기준점, 즉 좋음에 의거해 스스로를 전개해나간 것입니다. 그 결과로 미생물을 분해해 도움을 주는 박테리아(그리고 박테리아의 이데아)가 생기고, 모든 생명들의 기원이되는 태양이 생기고, 그 외에도 수많은 이데아가 생기고, 이것을 바탕으로 현상계가 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요.

 

 즉 선의 이데아는 이데아들이 존재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더나아가 존재로서 지향항 목적까지 제공하는 근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의 이데아를,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에서 태양에 비유합니다. 태양이 태양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 생물들 그자체가 될 수는 없지만(제 아무리 태양이라고 해도 여기에 있는 나와 동일한 것은 아니듯), 자신의 빛을 비춤으로써 그러한 모든 개별적 생명의 근원이 되듯, 선의 이데아가 모든 개별적 이데아 그자체는 될 수 없지만, 모든 이데아, 더나아가 그로 말미암은 현상계의 모든 것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의 이데아는 이데아 중의 이데아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근원이 되고, 또한 추상적으로 이해함에 있어 개별적인 이데아들 보다 상위에 있는 최상층의 이데아입니다. 왜냐하면 나무의 이데아는 나무들이라는 개별자들의 공통된 속성을 추림으로써 깨달을 수 있지만, 선의 이데아는 그러한 나무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이데아이므로 추상적으로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러한 선의 이데아는, 변증법적인 사유로써 도달할 수 있는 최상위 개념이며, 이러한 선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자, 바로 철인이 국가를 통치해야, 비로소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목적에 걸맞는 이상적인 정치가 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 철인정치론을 근거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되기도 합니다.

고타마 싯타르타는 고행을 통해 자기 안의 부처를 깨달음으로 석가모니 불(깨달은 자)이 되었습니다. 나를 뚫으니 모두와 통하고 심지어 우주의 진리에까지 통하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은 그의 깨달음을 듣기 위해 찾아왔고 그와 함께 해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외연확장을 바깥의 사람들을 우리 쪽으로 오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말 외연확장을 하는 방식은 자기를 바로 세우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가 깊은 정신, 깊은 가치로 확고히 서면 석가모니와 같이 저절로 외연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석가모니와 같이 득도하는 데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도 경험하는 일반적 원리입니다. 좋은 음식점이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가고 좋은 유투브가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리더십이 있으면 사람들은 찾아가 따르는 것입니다. 먼저 '좋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스페셜이 있으면 사람들은 알고 찾아옵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바깥이 아니라 항상 우리 자신이라 봅니다.  우리 자신이 깊은 가치 정신으로 확고히 서면 외연확장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지난 3월부터 집회가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당분간 집회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집회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 발이 묶인 시간에 우리 자신의 가치 정신을 더욱 깊게 뚫는 시간이 되었으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보편정신에 이르고 모두와 연결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리더십이란 자기확신, 가치에 삼켜진 자기확신을 가진 이들에게서 발생하고 사람들은 그 리더십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자각하고 그 가치로 자기확신으로 삼켜질 때 리더십이 발생하고 국민은 따르지 않을까 소견을 적어 봅니다.

 

이번에 읽은 책의 주인공인 철학자는 석가모니랍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처님이시죠. 아이가 왜 책을 가져오더니 "왜 이제야 읽게 됐지? "라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네요. 익숙한 철학자들 책을 먼저 읽고 조금 낯선 이름의 철학자들의 책을 나중에 읽기로 했답니다. 지금은 낯선 이름의 철학자들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석가모니가 이제야 눈에 띄었나 봅니다. 그런데, 아이는 무교지만 부처님을 좋아하는 터라 왜 이제야 책이 보이지 싶었나 보네요.

마음 찾겠다고 불공을 드리려 다니던 1970년대입니다. 
섣달 그음 향.초. 과일 세가지. 나물 세가지. 공양미. 떡만들 쌀가루를 등에 지고 서울 삼각산 문수사에서 정월 초하루 불공을 올리려고 밤에 산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우연히 문수사를 가본 일이 있어 문수사를 택해 산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산을 올랐을까 어찌나 함박눈이 쏟아지는지 길을 분간하기 어려워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섣달 그음이면 집을 떠나 있던 사람도 부모형제를 찾아 아들딸을 찾아 집을 찾는 것인데 나는 어찌해서 부모형제를 버리고 어린 자식들과 처를 버리고 산길을 오르고 있는가? 내일 아침이 설인데, 아침에 밥을 해 먹을 쌀이라도 있을까.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고 혼자서 애가 탈 마누라를 생각하니 내 신세가 처량하기 한이 없어 자신도 모르게 주룩 주룩 눈물이 났습니다. 한참을 서럽게 울다 내가 왜 울고 있지.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는 지금 마음을 찾아 집을 나온 것이야. 이렇게 생각을 하니,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각났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집을 버리고 출가를 하셨지. 그래. 그렇지.석가모니 그대가 장부라면 나도 장부다. 집을 나온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나" 나 같지 않는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도 출가 하실 때 나와 같이 울었을까? 울기로 하자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몇 날 몇일을 더 많이 울었을 것이 아닌가?  "어째서" 나보다 버릴 것이 많았을 것이니까.  왕자의 자리도 아들도. 왕이신 부모도. 부귀도. 마누라도 지금 내 마누라보다 이뻣을 것이 아닌가. 버리기로 하니 지금 나는 석가모니보다 버릴 것이 하찮아 버릴 것이 더 적은데, 내가 왜 울고 있지. 이런 것을 업연이라 하는가 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울음이 절로 뚝 끊어져 이깟 눈 땜에 내가 가고자 하는 문수사를 가지 못한단 말인가. 기어서라도 가자 하고 벌떡 일어서니,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하며 앞 길을 밝혀 주기를 세번 하였습니다.

 

한번 번갯불이 번쩍 할 때. 시야에 보이는 곳까지 길을 읽어 뒀다 길을 다 가서 헤매게 될 지음 다시 번갯불이 번쩍하여 세번째 번갯불이 번쩍일 때 문수사가 보여 반겨주는 이 없는 문수사 냉 방에서 움크리고 있다가 도량석 하기전에 법당에 나가 부처님께 공양올릴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불공을 올리고 온적이 있었습니다. 수행하다가 앞이 캄캄하여 방향을 정하지 못할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부처님도 수행하실 때 이런 적이 있으셨을까? 있었다면, 이럴 때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의심하고 의심하다 보면 "아!~ 부처님께서도 이럴 때 이렇게 하셨겠다 나름대로 답이 나왔습니다. 왜. 라는 의심. 의심하는 것이 곧 자기를 개발 하는 한 방편입니다. "오늘 우리 수행자는 부처님보다 버릴 짐이 더 적지 안습니까?" 부처님도다 버릴 것이 적은 가벼운 짐 지고 있는 오늘 우리 도반님들 열심이들 가십시다. 안될 때. 답이 안 나올 때.  왜.! 한마디가 나를 끌고 가는 수래입디다.


양력 430(4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이 금년은 코로나19로 양력 530(4월초8)로 연기되었다.

생존하신 부처님 석가모니의 탄생부터 성불까지 그리고 열반하시는 삶(BC623-BC544)은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가신 길위의 삶을 3회에 걸처 알아보겠습니다. 석가모니의 석가는 종족의 이름으로 능하고 어질다뜻이며, 모니는 성자라는 뜻입니다. 연등불로부터 수기받고 도솔천 내원궁에서 호명보살로 계신 석가모니(願生원생)께서는 부처가 될 인연처와 중생(業生업생)을 교화할 터전으로 선택한 나라는 카필라국은 인도 북부 비옥한 땅을 가진 나라의 왕인 정반왕과 왕비 마야부인을 부모로 선택합니다. 정반왕과 마야부인사이에 20여년이 넘도록 왕자가 없어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던중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유명한 해몽가로부터 거룩한 태자를 얻을 길몽이라 말을 듣습니다. 이윽고 산달이 되어 당시의 풍습에 따라 마야부인은 친정인 코올리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때는 화창한 4월 초순 룸비니(마야왕비모친이름)동산에 이르니 꽃들의 향기와 각양각색의 산새들은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지만 산모에게 힘든 고통이 따르는데 산통을 막아주는 無憂樹무우수(근심없는)나무 가지가 잡히는 순간 고통없이 오른쪽(올바른방향.왕자신분) 옆구리로 태자가 탄생(4월초8)하는데 아홉 마리 용이 목욕을 시켜줍니다. 태자는 탄생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르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르키며 외쳤습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네”. 나 홀로 높다는 말씀 속의 는 어느 한 개인의 가 아닌 모든 이들이 다 갖추고 있는 참된 나 인간 존엄의 선포인 佛性불성이다.

 

특별한 의미와 모습으로 태어난 태자의 이름은 모든 것을 성취한다는 뜻으로 고타마() 싯달타로 정하나 어머니 마야부인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이모인 마하파사파제(최초비구니)에게서 자라나게 된었습니다. 탄생후 아시타인 선인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를 보고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며, 출가를 하면 받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고 예언했습니다.  12살 때 이른 봄 태자는 정반왕을 따라 농경제에 참석하여 지켜보는데 농민들의 쟁기질로 땅속에 있던 벌래들이 노출되어지니 바로 새들에게 쪼아먹히는 약육강식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고는 나무 아래 사색에 잠기며 고통과 죽음이 없는 삶에 대한 명상을 자주하게 됩니다. 이에 걱정이 된 정반왕은 태자에게 三時殿삼시전(여름.겨울.봄가을집)을 지어주고, 16세에 서둘러 간택을 하여 야쇼다라를 싯달타 아내로 맞이하여 그런대로 세월이 흘렀습니다. 29세에 왕위를 이어받는 수업으로 四門遊觀사문유관을 하는데 이는 동남서북(태양이도는방향)의 대문밖으로 나가서 늙고 병들고 죽음 그리고 출가자의 모습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후 나는 출가하여 바른 법을 실천함으로써 생각과 행동이 조화되어 중생을 보호하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도록 영원히 해탈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출가라는 결심으로 출가를 합니다.


지난 달에 교구 주보 1면 사진에 문모 신부와 모 스님이 나란히 걷는 모습의 사진을 실었더군요.
거기다가 오늘은 평화방송에서 영성강의 시간에 부처님 불공 등을 예로 들면서 영성을 강의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몇년전 명동성당 강의에 스님이 나와서 천주교와 불교는 비슷하다라고 강의 동영상을 좀 보다가 만 적도 있습니다. 천주교 영성이 불교스러워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정작 석가모니와 예수님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창조이전에 삼위일체의 친교안에 계시다가 이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 들어와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낮추고 비우셨다가 성부하느님에 의해 다시 부활하여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의 주인으로 다시 되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좀 뭔가 반대방향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한 미물이 억겁의 세월에 걸쳐서 윤회론적으로 진화론적으로 점점 더 차츰 높아지면서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석가모니는 높아지고자 비우고 깨달을려고 했던 반면에 예수님은 낮은자가 높은자라고 하면서 지금도 구속주로서 고통을 받는 종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깨달음, 자력구원 등을 얘기하는 걸 보면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천주교가 동양에서 불교라는 영지주의 집합체의 새로운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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